서울 서초의 한적한 주택가, 청계산이 드리운 이 곳에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숲을 닮은 건축물이 있다. 수직으로 배열된 금속 파이프 사이로 스며드는 빛과, 그 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움직인다. 이곳 오디움(Audeum)은 소리를 전시하는 박물관이자, '보이지 않는 소리'를 공간으로 번역한 건축이다. 여기서 금속은 자연의 표현이 되고, 감각의 매개가 된다.
오디움, 건축으로 표현한 소리의 공간
쿠마 켄고가 설계한 금속과 자연의 건축
오디오 전문 박물관 오디움은 일본의 건축가 쿠마 켄고가 설계했다. 그는 '자연 요소를 현대적인 재료 그리고 각 장소의 특징과 융합'하는 건축 세계로 주목받아왔으며, 오디움에서도 이런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수직으로 배열된 알루미늄 파이프가 촘촘히 둘러싼 건물 외벽은 멀리서 보면 단단한 금속의 집합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빛과 그림자를 머금은 숲처럼 느껴진다. 이곳에서 금속은 단순한 외장재가 아닌, 빛을 조율하는 필터이자 소리의 공간으로 초대하는 전주곡이다.
빛과 금속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변화
차갑고 견고한 재료인 금속은 오디움에서 자연의 리듬을 닮은 존재로 재해석된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광은 파이프 사이를 통과하며 내부에 미묘한 명암을 드리우고, 건물은 고정된 구조를 넘어 빛에 반응해 유기적으로 변화한다.
2025년 12월 유네스코가 주관하는 베르사유 건축상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박물관' 부문에서 오디움은 내부 특별상(Special Prize for an Interior)을 수상했다. 이는 단순히 외형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혁신성, 독창성, 지역성, 공공성, 지속 가능성 등 다층적 기준을 통해 수여되는 상이다.
실내 공간의 감각적 완성도와 기능적 설계가 균형을 이뤘다는 점에서 오디움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내부에 들어서면 목재가 주는 따뜻한 질감과 향, 금속의 선형 구조가 조화를 이룬다. 수직 파이프 구조는 외부에서 내부로 자연스레 이어지며 공간의 리듬을 형성한다. 천장과 틈을 통해 부드럽게 스며드는 자연광의 움직임을 따라 관람객의 동선도 정해진다. 시각, 청각, 촉각, 후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총체예술적(Gesamtkunstwerk) 공간이라는 설명이 과장이 아님을 체감하게 한다.
오디움에서 만나는 오디오 기술의 역사
150년 오디오 발전사를 담은 전시
1877년 유성기 발명 이후 약 150년에 걸친 오디오 발전사를 정리하는 전문 박물관이 바로 오디움이다. 19세기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 재생기계, 웨스턴 일렉트릭 라우드스피커와 같은 세계적 음향시스템 등 폭넓은 소장품을 통해 기술과 예술의 접점을 보여준다.
상설전 《정음(正音): 소리의 여정》은 오디오 기술사의 전환점을 상징하는 기념비적 스피커들을 중심으로, 원음에 가까운 '정음'을 구현해 온 흐름을 소개한다. 전시는 도슨트 투어로 진행되며, 3층에서 시작해 지하 2층 라운지에서 마무리되는 동선은 시간을 거슬러 내려가는 방식이다.
웨스턴 일렉트릭 혼 스피커가 들려주는 시대의 변화
3층에서 1950~60년대 가정용 스피커 컬렉션을 관람한 후, 2층으로 내려오면 1920~30년대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이 기다리고 있다. 이어, 1층 스페셜 갤러리에서는 18~19세기에 발명된 뮤직박스를 볼 수 있고, 그중 웨스턴 일렉트릭의 혼 스피커 12A와 13A는 최초의 대형 극장용 사운드 시스템 중 하나로, 1920년대 영화관에서 쓰였던 극작용 스피커 시스템이다. 4미터가 넘는 금속 혼(Horn)을 통해 강력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사운드를 구현하며, 음악과 음성을 보다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1927년 영화 <재즈 싱어>에 쓰이며 무성 영화 시대의 종식을 알린 기념비적 스피커기도 하다.
금속은 이곳에서 소리를 '확장'하는 도구로 기능한다. 혼의 곡선이 음파를 증폭하고 멀리 전달하도록 설계됐다. 앞에 서면, 기술이 단순한 기능을 넘어 시대의 전환을 이끌어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이를 담는 그릇은 단단하다. 오디움의 전시물들은 금속이 어떻게 '감각의 인프라'로 작동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듣는 경험을 확장하는 오디움 프로그램
오디움은 전시에만 머무르지 않고 '듣는 경험'을 확장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오디오 살롱'은 특정 음반이나 장르를 주제로, 전문가의 해설과 함께 음원을 감상하는 청음 프로그램이다. 관람객들은 클래식부터 재즈, 팝, 영화음악에 이르기까지 고음질 사운드의 진면목을 경험할 수 있다. 단순한 음악 감상을 넘어, 공간과 소리, 기술이 어우러진 예술적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 워크'는 150여 명의 시각장애인과 안내자가 참여한 배리어프리 투어로, 상설전 《정음(正音): 소리의 여정》을 청각과 촉각 중심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획된 행사다.
또한 클래식 명반을 해설과 함께 감상하는 프로그램인 '렉처 오디오 콘서트'는 웨스턴 일렉트릭 혼 스피커 12A, 13A와 극장용 사운드 시스템 미러포닉 시스템을 통해 구현되는 입체 음향을 경험하게 하며, 공간 자체가 하나의 악기처럼 작동하는 순간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감각, 자연, 공동체를 연결하고자 하는 오디움의 방향성을 보여준다.
금속과 소리가 만드는 새로운 감각
음향시스템이라는 매체 속에서 예술과 금속, 기술은 아주 가까이 맞닿아 있다. 오디움에 머무는 동안 그 사실을 더욱 또렷해진다.
자연을 닮은 금속의 건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소리의 세계. 오디움은 늘 같은 폭과 같은 속도로 흐르는 사고의 결에 작은 균열을 만든다. 어쩌면 그 틈은 일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창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