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us+ 2026-09-28
탈탄소 시대의 한국 철강 산업, GX로 준비하는 글로벌 경쟁력- 글. 이재윤 산업연구원 산업전환전략연구단 산업탄소중립연구실 실장
글로벌 경기 둔화와 통상 환경 변화 속에서 탄소 중립을 둘러싼 산업 환경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는 탄소 중립의 후퇴가 아닌 산업과 무역 질서가 재구성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앞으로는 기업의 자발적인 노력보다 탄소 가격, 무역 규제, 공급망과 같은 새로운 시장 질서가 철강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글로벌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한국 철강 산업이 어떤 전략을 마련해야 할지 살펴본다.
탄소 중립 시장의 재편과 그린스틸의 새로운 수요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글로벌 탄소 중립 계획이 이전보다 더뎌졌다. 유럽마저 산업 경쟁력 약화와 경기 부진을 고려해 일부 정책의 속도를 조절했고, 이를 본 철강 업계는 “그린스틸 시장은 아직 멀었다”고 인식하고 있다. 실제 시장 상황을 살펴보면 이러한 판단에도 일정 부분 근거가 있다.
기사에 따르면 2025년 유럽의 판재류 그린스틸 거래량은 20만 톤에 미치지 못했고, 연초와 비교해 그린 프리미엄도 약 10% 하락했다. 기업들의 투자 발표와 정책적 관심에 비하면 실제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경기 부진과 산업 생산 둔화에 높은 에너지 비용과 통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서, 자동차·건설 등 주요 수요 산업은 당장 탄소보다 가격과 품질, 공급 안정성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탄소 가격과 규제가 만드는 그린스틸 시장
그렇다고 이러한 소강기를 탄소 중립의 종언으로 바라보는 것은 위험하다. 현재 나타나는 변화는 탈탄소 정책이 소멸하고 있다기보다 기후 정책이 산업 정책과 통상 정책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과거 그린스틸 시장을 이끌었던 것이 기업의 자발적인 탄소 감축과 사회적 책임이었다면, 앞으로는 탄소 가격과 무역 규제, 공공 조달, 공급망 계약이 직접적으로 수요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크다.
기사에 따르면 2025년 유럽의 판재류 그린스틸 거래량은 20만 톤에 미치지 못했고, 연초와 비교해 그린 프리미엄도 약 10% 하락했다. 기업들의 투자 발표와 정책적 관심에 비하면 실제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경기 부진과 산업 생산 둔화에 높은 에너지 비용과 통상 불확실성까지 더해지면서, 자동차·건설 등 주요 수요 산업은 당장 탄소보다 가격과 품질, 공급 안정성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다.
2026년에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본격 시행에 들어갔으며, 철강업에 제공되던 EU 배출권거래제의 무상 할당 역시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축소될 계획이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 조사 기관(Fastmarkets)은 현재 톤당 약 80유로인 EU 배출권 가격이 2035년에는 142유로 수준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러한 전망이 실제 가격 경로에 반영될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고탄소 철강의 비용 부담은 커지고, 반대로 저탄소 철강의 경쟁력은 높아지는 방향은 분명하다. 특히 자동차 산업은 Scope 3 배출량 관리 압력이 강한 데다, 저탄소 소재의 추가 비용을 제품 가격에 반영할 여력도 상대적으로 크다.
수요 산업별로 달라지는 저탄소 철강의 선택
이에 따라 유럽 그린스틸 수요에서 자동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30년 29%에서 2035년 33%로 확대될 전망이다. 반면 가격 민감도가 높은 건설과 일반 제조업은 초저탄소 제품보다 배출량을 일정 수준 낮춘 제품부터 단계적으로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그린스틸 시장은 하나의 단일 시장이 아니라 수요 산업의 감축 필요성과 지불 능력에 따라 여러 단계로 형성될 것이라는 의미다.
공공 조달과 산업 규제 역시 초기 수요를 견인할 동인이다. 유럽에서는 자동차 규제에 저탄소 소재 사용을 연계하고, 건축물과 인프라 프로젝트에 저탄소 철강의 일정 비율을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가 현실화되면 기업의 자발적인 친환경 선택이었던 그린스틸 구매는 시장 접근과 규제 준수를 위한 조건으로 바뀌게 된다.
한국 철강 업계에는 위협이 될 수 있지만, 탄소 집약도와 인증 요건을 충족한다면 새로운 수출 시장을 확보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철강 산업이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탈탄소를 할 것인가”가 아니다. 이제는 “다음 수요 확대기가 왔을 때 우리는 어느 위치에 서 있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문제는 그 순간에 설비와 인증, 원료 공급망을 갖춘 기업만이 프리미엄을 흡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요가 폭발한 이후 준비에 나선다면 이미 늦다.
한국형 GX에서 주목해야 할 전기로의 역할
앞으로 정부가 추진할 GX(녹색전환) 전략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설계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GX는 탄소 감축을 단순한 환경 정책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 신산업 육성, 지역 투자를 하나의 전환 전략으로 연결하고 있다. 한국 역시 재생에너지 확대나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강 산업의 공정 전환이 새로운 제품과 시장을 만들고 공급망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기로를 중심으로 확대되는 저탄소 생산
이 과정에서는 전기로 산업의 중요성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전기로는 철 스크랩을 활용해 고로보다 낮은 탄소 집약으로 철강을 생산할 수 있다. 여기에 청정 전력과 저탄소 DRI(Direct Reduced Iron)·HBI(Hot Briquetted Iron)의 활용이 확대될수록 그 잠재력은 더욱 커진다. 중국과 인도 역시 전기로와 DRI를 재생에너지, 수소, 건설·인프라 수요와 연계하면서 저탄소 전환을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 정부가 2025년 상반기 신규 승인한 조강 설비는 전량 전기로 방식으로 채워졌다. 인도의 JSW Steel 역시 남부 라얄라시마에 철 스크랩과 고품위 DRI를 활용하는 연산 200만 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해 건설·인프라용 구조 용강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이는 인도의 빠른 철강 설비 확대가 고로 중심의 양적 증설을 넘어 철 스크랩·고품위 DRI 기반 전기로와 건설·인프라 수요를 결합하는 저탄소 성장 전략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 스크랩과 저탄소 원료로 구축하는 공급망
그러나 전기로 확대만으로 안정적인 저탄소 생산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고급 판재와 특수강, 고부가 강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철 스크랩의 양뿐 아니라 품질 역시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발달한 철 스크랩 회수·가공 체계를 갖춘 미국조차 고급 판재 생산에 필요한 저잔류원소 스크랩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DRI·HBI·선철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특히 한국은 미국보다 스크랩 발생량과 품질관리 기반이 취약하다. 여기에 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감축 수단 대부분이 고로·전로 내 철 스크랩 활용과 관련돼 있어, 국내에서도 치열한 철 스크랩 확보 경쟁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문제는 단순한 원료 조달 차원을 넘어 산업 전환의 핵심 과제로 다뤄야 한다. 이에 국내에서는 철 스크랩의 등급별 분리·선별·가공 체계를 고도화해 고급 스크랩의 회수율과 활용도를 높이는 한편, 해외에서는 저탄소 DRI·HBI 공급망을 장기적으로 확보해 나가야 한다.
미국 전기로 업체의 대응도 참고할 만하다. 뉴코어는 스크랩 수집·가공 네트워크를 계열화해 자사 전기로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으며, Steel Dynamics의 경우 Iron Dynamics를 통해 고품위 용선을 자체 생산함으로써 외부 고급 스크랩과 선철·DRI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강관으로 이어지는 저탄소 전환과 새로운 성장 기회
GX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존 산업의 배출량을 줄이는 데만 있지 않다. 산업 전환을 새로운 성장 기회로 연결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강관은 한국 철강 산업의 저탄소 전환과 미래 수요를 이어줄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다.
향후 투자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시장으로는 해상 풍력 하부 구조물과 수소·CO₂ 이송용 파이프라인, 원전 및 저탄소 에너지 인프라 등이 있다. 이들 분야에서는 강도, 내식성, 용접성과 같은 기존 품질 요건뿐 아니라 제품의 탄소 배출 정보와 공급망 투명성까지 중요한 구매 조건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미래 에너지 인프라로 확장되는 저탄소 강관
전기로에서 생산한 저탄소 소재를 고부가 강관 제품으로 연결하고, 이를 다시 수소·풍력·CCUS(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 등 미래 에너지 인프라에 투입되는 구조는 산업 전환과 신시장 창출을 동시에 추구하는 GX의 취지와 부합한다.
따라서 정부와 업계는 전기로 전환과 저탄소 소재 생산, 친환경 강관 등 유망 분야를 각각의 과제로 나눠 추진하기보다 하나의 중장기 로드맵으로 연결해야 한다. 저탄소 원료와 청정 전력 공급부터 제품의 탄소 배출 산정과 인증, 공공 조달과 초기 시장 형성, 에너지 인프라 투자까지 일관된 방향으로 추진해야 기업 역시 예측 가능성을 바탕으로 투자할 수 있다.
시장 확대에 앞서 갖춰야 할 전환 기반
기업 차원에서도 정책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현재의 시장 소강기를 활용해 저탄소 원료와 제품의 포트폴리오를 정비하고 탄소 배출 데이터를 축적하는 한편, 주요 수요 기업과 공동 실증 및 장기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을 때 필요한 것은 선언적인 탄소 중립 목표가 아니라 실제 공급할 수 있는 제품과 검증된 데이터, 안정적인 원료와 에너지 공급망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그린스틸 수요 부진을 탄소 중립 경쟁의 종료로 보기보다는 다음 경쟁을 앞둔 조정 현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산업 전환기의 승자는 규제가 가장 강한 시기에만 움직인 기업이 아니라, 시장의 관심이 느슨해진 시기에도 준비를 멈추지 않은 기업이었다. 지금의 소강기를 단순히 견디는 데 그칠지, GX를 통해 전기로와 강관을 새로운 성장 축으로 전환할지에 따라 한국 철강 산업의 미래 위치도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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