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us+ 2026-02-12
전통 간식의 상징, 엿의 역사와 오늘의 변주
매년 11월이 되면 제과점이나 슈퍼마켓, 편의점, 대형마트 입구에는 은근한 윤기가 흐르면서도 포슬포슬한 사탕 덩어리들이 자리를 채운다. 과거시험을 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험생 선물로 사랑받아 온 전통 간식, 엿이 그 주인공이다. 달콤한 위로이자 끈끈한 인연, 합격과 성공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우리 곁에 자리해 온 엿의 이야기를 풀어본다.
우리 곁에 오래 머문 달콤한 전통
기록과 그림 속에 남은 엿의 역사
생각보다 엿과 우리 민족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고려 문신 이규보의 <동국여지승람>에서 엿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고, 조선시대 <영조실록>에는 '이번 과거 시험장은 엄숙하지 못하여 떡과 엿, 담배를 거리낌없이 팔았다'라는 구절이 적혀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 <씨름> 속에는 구경꾼들 앞을 어슬렁거리는 엿장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곡물과 시간, 손이 빚어내는 맛
엿기름에서 시작되는 단맛의 원리
사실 엿은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보리를 물에 불려 싹을 틔운 후 말려 가루로 빻으면 엿기름이 만들어진다. 이 엿기름을 따뜻한 물에 우리면 효소가 전분을 당으로 분해하면서 은근한 단맛이 우러나는데, 여기에 찐 쌀이나 찰보리를 넣고 고루 섞은 후, 하룻밤 정도 삭히면 걸쭉한 단물이 남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시 이 단물을 솥에 붓고 몇 시간 동안 졸이면 점차 끈적해지면서 색이 진해지는데 불의 세기와 조리 시간에 따라 꿀처럼 흐르는 조청이 되기도 하고, 물기 없이 단단한 엿이 나오기도 한다.
전통 제법에 담긴 과학과 지혜
삭힌 보리에서 단맛을 끌어내는 전통 제법은 과학과 지혜의 산물이다. 곡물의 전분이 엿기름 속 효소에 의해 당으로 분해되며 생기는 천연의 단맛은 자연이 빚어낸 달콤함이다.
엿 제조 과정에서 또 하나 주목할 것이 있다. 바로 장인의 기술이다. 불의 세기와 온도 조절로 점도를 만들어 내는 기술은 세대를 거쳐 전수되는 손끝의 기술이다.
장터를 울리던 달콤한 외침
설탕의 등장과 엿의 대중화
한편 조선 후기가 되면서 설탕이 도입되며 엿 제조법 역시 달라졌다. 전분 대신 설탕을 녹여 굳히는 방식이 퍼지며, 엿은 대중 간식으로 변모했다. 장날이 되면 엿장수의 힘찬 외침이 장마당을 울렸고, 엿판 앞에는 군침을 삼키는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그 시절 엿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서민들에게 흥겹고 달콤한 위로였다.
엿장수, 장터의 예능인이 되다
"엿이요, 엿! 달콤한 엿 나왔어요!"
장터의 풍경을 떠올리며 가장 먼저 들려오는 소리는 목청 좋은 엿장수의 외침이다. 1970년에서 1980년대까지만 해도 볼 수 있었던 '엿 타기' 시연은 작은 공연이었다. 커다란 엿 덩어리를 번쩍 들어 올린 후, 공중에서 길게 늘였다가 접는 과정은 마치 마술 같았다. 과거 장터에서 엿장수는 상인보다는 길거리의 예능인에 가까웠다.
쇠와 소리가 만든 전통의 도구
엿가위, 자르는 도구를 넘어선 상징
엿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도구도 있다. 바로 '엿가위'다. 엿장수는 긴 밧줄 모양으로 엿을 말아 가위와 정으로 한입 크기의 조각을 낸다. 하지만 엿가위가 단순히 절삭 도구의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니다. 엿장수에게 엿가위는 절삭 도구이자 악기이기도 했다. 능숙한 엿장수는 엿가위의 둔탁한 날과 헐렁한 조임쇠를 이용해 '짤깍짤깍' 흥겨운 리듬을 만들어냈다. 그 금속의 진동은 장터의 배경음악이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신호가 됐다.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태어난 엿가위
조선시대 엿가위는 당연히 대장장이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단단한 엿을 자르려면 강한 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과 쇠, 그리고 대장장이의 손끝이 빚은 엿가위는 전통 기술의 상징이었다. 오늘날에도 대장간에서 수공으로 제작되는 엿가위는 여전히 '짤깍짤깍'하는 특유의 소리를 들려주며 전통의 맥을 잇는다.
전통 간식의 새로운 얼굴
프리미엄화와 리브랜딩으로 확장되는 엿의 세계
전통시장을 넘어 최근에는 백화점이나 온라인몰에서 수제 엿과 견과 엿 등이 인기를 얻고 있다. 설탕 대신 쌀 조청이나 꿀을 사용한 제품이 건강식으로 재조명받는가 하면 '무설탕 엿', '비건 엿', '저당 엿' 등 프리미엄 라인도 등장해 젊은 세대의 호응을 얻고 있다.
지역마다 선보이는 특색 있는 엿도 눈길을 끈다. 인삼 엿, 흑미 엿, 오미자 엿, 보리 엿 등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제품이 관광 상품으로 발전하기도 하고, 전통 장인들은 현대적 포장 디자인과 브랜드 스토리텔링을 더한 '전통 간식의 리브랜딩'을 시도하고 있다.
현대 디저트와의 협업을 통해, 또 한 번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는 사례도 있다. 엿 라테, 엿 맛 젤리, 엿 초콜릿 등은 엿의 힙한 진화를 보여준다.
만드는 즐거움으로 이어지는 전통
단순히 엿을 먹는 것을 넘어 엿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전국 각지의 엿 공방에서는 방문객이 직접 엿기름을 우려내고, 반죽을 늘린 후 엿가위로 자르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엿은 '구경하는 전통'에서 '향유하는 전통'으로 변화하며 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엿에 담긴 마음의 의미
어린 시절 시장에서 부모님을 졸라 엿을 사 먹던 세대에게 엿은 '추억의 단맛'이고, 새롭게 접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느리게 즐기는 단맛'이다. 빠르고 자극적인 세상 속, 천천히 녹아드는 엿의 달콤함은 우리에게 전하는 또 하나의 '느림의 미학'이 된다.
합격과 인연의 상징
엿은 '합격의 상징'이다. 끈적한 엿처럼 잘 붙으라는 의미를 담아 수험생에게 엿을 선물하는 풍습은 무려 조선시대 과거시험부터 내려왔다. 오늘날에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시즌이 되면 제과점이나 슈퍼마켓, 편의점, 대형마트마다 '합격 엿'이 등장한다. '딱붙어엿', '힘내엿', '합격이당 엿' 같은 문구는 장난스럽지만, 속에 깊은 진심이 담긴 한국식 격려다.
또한 엿은 '끈끈한 관계'의 상징이기도 하다. 혼례나 돌잔치, 명절에 엿을 나누던 풍습은 길상(吉祥)의 의미와 함께 가족과 이웃 간의 유대감을 돈독히 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혼례를 앞둔 신랑이 신부의 집에 엿을 보내는 '엿보내기' 풍습은 좋은 인연을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손끝의 온기, 철의 강도, 그리고 마음의 온도가 어우러져야 완성되는 맛, 엿을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고, 누군가의 인연을 이어준다. 달콤 쌉싸름한 우리 인생의 맛처럼, 엿은 그렇게 끈끈하게 우리 곁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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