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6일, 느지막이 겨울의 끝을 알리며 내린 싸락눈 속에서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격정 어린 선율로 달아올랐다. 이날 무대를 채운 작품은 벨칸토 양식의 정점으로 불리는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로,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권력 구조 속에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은 올해도 대중이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보다 깊은 예술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 권력과 감정이 교차하는 비극
사랑이 아닌 권력의 구조로 읽히는 관계
2015년부터 매년 엄선된 작품을 무대에 올려온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가 올해 선보인 작품은 <로베르토 데브뢰>다. 흔히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로 요약되는 작품이지만, 본질은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층위에 놓여 있다. 엘리자베타 1세와 로베르토, 노팅엄 공작과 사라로 이어지는 관계는 단순한 삼각 구도로만 보기는 어렵다. 네 인물이 서로를 향해 교차하는 이 사각의 구조 속에서 감정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게 된다.
사랑은 선택이 아닌 정치적 판단이 되고, 의심은 감정이 아닌 권력의 작동 방식이 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곧 누군가를 의심하는 일이 되고, 그 의심은 결국 처벌의 근거가 된다. 이처럼 작품은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권력에 의해 어떻게 재편되는가를 보여준다.
왕관 아래 무너지는 인간의 내면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음악은 사건의 설명보다는 인간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선율은 점점 절제되고 긴장감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응축된다. 그리고 마침내 여왕이 왕관을 내려놓는 순간은 단순한 역사적 장면이 아닌 한 인간이 감당해 온 무게가 조용히 무너지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객석은 잠시 숨을 죽인 채 그 좁게 쪼개진 균열을 함께 통과한다.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가 완성한 깊이 있는 무대
이번 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완벽한 하모니의 바탕이 된 '시간'에 있다.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 오래 후원해 온 성악가들이 한 작품 안에 만나 각자의 시간과 경험이 빚은 목소리를 포개며 깊이 있는 울림을 선사했다. 단순한 협연을 넘어 재단의 지속적인 예술 후원이 하나의 무대 위에서 열매를 맺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휘자 데이비드 이를 비롯해 소프라노 최지은, 테너 김범진, 바리톤 최인식은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의 후원을 통해 국제 무대에서 꾸준히 활동 영역을 넓혀온 아티스트들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다시 한 무대에 올라 한층 깊어진 호흡을 선보였으며, 각기 다른 무대에서 쌓아온 경험과 시간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작품의 완성도를 더 높였다.
테너 김범진은 로베르토 역을 맡아 서정성과 불안을 교차시키며, 완성된 영웅의 면모보다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흔들리는 한 인간의 결을 드러냈다. 소프라노 최지은의 엘리자베타는 인간의 고독과 권력자의 위엄 사이를 오가며 인물의 이중적인 내면과 균열 과정을 섬세한 감정 표현을 통해 소리로 구현했다. 노팅엄 공작을 맡은 바리톤 최인식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억누르며 만들어낸 긴장 속에서 감정의 파동을 깊이 있게 전달하며 극의 중심이 되었다. 그 모든 관계의 중심에 선 사라는 침묵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중요한 축의 역할을 해냈다.
이날 무대에서 울린 성악가의 소리는 단순히 음정을 높이는 기교가 아니라, 오래 붙잡고 있던 감정이 끝내 밀려드는 순간의 전율로 다가왔다. 특히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것이 아닌, 폭발 직전의 상태를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술적 실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간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예술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 이어가는 문화예술 후원
순수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던 고(故) 이운형 회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3년 설립된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은 젊은 성악가의 발굴과 성장, 그리고 주요 무대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이번 음악회는 그렇게 축적된 시간을 한 작품 안에서 다시 교차하는 자리였다. 각자의 길을 걸어온 성악가들이 무대 위에서 만나는 순간, 관객은 하모니의 극치를 경험하게 된다.
작품성과 예술성으로 완성한 무대
매년 작품 선정에서 드러나는 방향성 역시 분명하다. 익숙함에 기대는 것이 아닌 작품성과 예술성을 기준으로 선택하며, 음악회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작품의 구조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한 서울시립교향악단도 빼놓을 수 없다. 오케스트라는 과도하게 전면에 나서기보다 성악의 흐름을 정교하게 받쳐주며 음악적 밀도를 유지했다. 지휘를 맡은 데이비드 이는 극적 과잉은 피하면서도 선율과 긴장 사이의 균형을 절묘하게 끌어냈다. 덕분에 음악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이 향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짚었다. 연출 역시 과장된 장치나 지나친 설명이 아닌, 인물 간의 거리와 시선, 그리고 정지된 순간들을 통해 관객 역시 장면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긴장을 만들었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결국 사람의 이야기다. 권력의 정점에 서서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조차도 사랑과 의심, 그리고 선택과 후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공연이 끝난 후에도 객석에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지 음악의 여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작품이 던진 질문,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무게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공연이 막을 내린 뒤, 비로소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