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찰하다

탈탄소 시대, 한국 철강 산업이 글로벌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략
글. 이재윤 산업연구원 산업전환전략연구단 산업탄소중립연구실 실장
탈탄소 시대, 한국 철강 산업이 글로벌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략
글. 이재윤 산업연구원 산업전환전략연구단 산업탄소중립연구실 실장
글로벌 경기 둔화와 통상 환경 변화 속에서 탄소 중립을 둘러싼 산업 환경도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이는 탄소 중립의 후퇴라기보다 산업과 무역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앞으로는 기업의 자발적 노력보다 탄소 가격, 무역 규제, 공급망 등 새로운 시장 질서가 철강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한국 철강 산업이 글로벌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마련해야 할지 살펴본다.
탄소 중립의 현재, 소멸 아닌 재편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글로벌 탄소 중립의 시계는 이전보다 느려졌다. 유럽마저 경기 부진과 산업 경쟁력 약화를 고려해 일부 정책의 속도를 조절하자 철강 업계에서는 “그린스틸 시장은 아직 멀었다”는 인식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실제 시장 상황만 보면 이러한 판단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기사에 따르면 2025년 유럽의 판재류 그린스틸 거래량은 20만 톤에 미치지 못했고, 그린 프리미엄도 연초보다 약 10% 하락했다. 정책적 관심과 기업들의 투자 발표에 비해 실제 시장은 아직 초기 단계인 것이다. 경기 부진과 산업 생산 둔화, 높은 에너지 비용과 통상 불확실성으로 인해 자동차·건설 등 주요 수요 산업도 당장은 탄소보다 가격과 품질, 공급 안정성을 우선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소강기를 탄소 중립의 종언으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 현재 나타나는 변화는 탈탄소 정책의 소멸이라기보다, 기후 정책이 산업 정책과 통상 정책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가깝다. 과거에는 기업의 자발적인 탄소 감축과 사회적 책임이 그린스틸 시장을 이끌었다면, 앞으로는 탄소 가격과 무역 규제, 공공 조달, 공급망 계약이 보다 직접적인 수요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크다.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2026년 본격 시행에 들어갔고, 철강업에 제공되던 EU 배출권거래제의 무상 할당도 2034년까지 단계적으로 축소된다. 글로벌 원자재 가격 조사 기관 Fastmarkets는 EU 배출권 가격이 현재 톤당 약 80유로에서 기본 시나리오상 2035년 142유로 수준까지 상승할 것으로 전망한다. 실제 가격 경로에는 불확실성이 있지만, 고탄소 철강의 비용 부담이 커지고 저탄소 철강의 상대적 경쟁력이 높아지는 방향은 분명하다. 자동차 산업은 Scope 3 배출량 관리 압력이 강하고, 저탄소 소재의 추가 비용을 제품 가격에 반영할 여력도 상대적으로 크다. 이에 따라 유럽 그린스틸 수요에서 자동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030년 29%에서 2035년 33%로 확대될 전망이다. 반면 가격 민감도가 높은 건설과 일반 제조업은 초저탄소 제품보다 배출량을 일정 수준 낮춘 제품부터 단계적으로 채택할 가능성이 크다. 그린스틸 시장이 하나의 단일 시장이라기보다 수요 산업의 감축 필요성과 지불 능력에 따라 여러 단계로 형성될 것이라는 의미다.
공공 조달과 산업 규제 역시 초기 수요를 견인할 동인이다. 유럽에서는 자동차 규제에 저탄소 소재 사용을 연계하고, 건축물과 인프라 프로젝트에 저탄소 철강의 일정 비율을 적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가 현실화되면 그린스틸 구매는 기업의 자발적인 친환경 선택을 넘어 시장 접근과 규제 준수를 위한 조건으로 바뀌게 된다. 한국 철강 업계에도 위협인 동시에, 탄소 집약도와 인증 요건을 충족한다면 새로운 수출 시장을 확보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철강 산업이 지금 던져야 할 질문은 “탈탄소를 할 것인가”가 아니다. “다음 수요 확대기가 왔을 때 우리는 어느 위치에 서 있을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문제는 그 순간에 설비와 인증, 원료 공급망을 갖춘 기업만이 프리미엄을 흡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요가 폭발할 때 준비를 시작하면 이미 늦다.
한국형 GX에서 철강 산업의 역할
앞으로 정부가 추진할 GX(녹색전환) 전략도 이러한 관점에서 설계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GX는 탄소 감축을 단순한 환경 정책 차원에서만 접근하지 않는다.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 신산업 육성, 지역 투자를 하나의 전환 전략으로 연결한다. 한국 역시 재생에너지 확대나 탄소배출 감축 목표만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강 산업의 공정 전환이 새로운 제품과 시장, 공급망 경쟁력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전기로 산업의 중요성을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전기로는 철 스크랩을 활용해 고로보다 낮은 탄소 집약도로 철강을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청정 전력과 저탄소 DRI(Direct Reduced Iron)·HBI(Hot Briquetted Iron)의 활용이 확대될수록 활용 잠재력이 더욱 커진다. 중국과 인도 역시 전기로와 DRI를 재생에너지, 수소, 건설·인프라 수요와 연계하며 저탄소 전환을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2025년 상반기 신규 승인한 조강 설비 전량을 전기로 방식으로 채웠고, JSW Steel은 인도 남부 라얄라시마에 철 스크랩과 고품위 DRI를 활용하는 연산 200만 톤 규모의 전기로 제철소를 건설해 건설·인프라용 구조 용강 시장을 공략할 계획이다. 이는 인도의 빠른 철강 설비 확대가 고로 중심의 양적 증설을 넘어, 철 스크랩·고품위 DRI 기반 전기로와 건설·인프라 수요를 결합하는 저탄소 성장 전략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전기로 확대가 곧바로 안정적인 저탄소 생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급 판재와 특수강, 고부가 강관을 생산하려면 철 스크랩의 양뿐 아니라 품질이 중요하다. 세계적으로 발달한 철 스크랩 회수·가공 체계를 보유한 미국조차, 고급 판재 생산에 필요한 저잔류원소 스크랩을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DRI·HBI·선철을 함께 사용한다. 특히 한국은 스크랩 발생량과 품질관리 기반이 미국보다 취약하고 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국가온실가스 감축 목표) 감축 수단이 대부분 고로·전로 내 철 스크랩 활용과 관련되어 있어 국내에서도 치열한 철 스크랩 확보 경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기에 이 문제를 단순한 원료 조달 차원이 아니라 산업 전환의 핵심 과제로 다뤄야 한다. 이에 국내에서는 철 스크랩의 등급별 분리·선별·가공 체계를 고도화해 고급 스크랩의 회수율과 활용도를 높이고, 해외에서는 저탄소 DRI·HBI 공급망을 장기적으로 확보해 나가야 한다. 미국 전기로 업체의 대응은 참고할 만하다. 뉴코어는 스크랩 수집·가공 네트워크를 계열화해 자사 전기로에 원료를 공급하고 있으며, Steel Dynamics는 Iron Dynamics를 통해 고품위 용선을 자체 생산함으로써 외부 고급 스크랩과 선철·DRI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강관을 저탄소 전환과 성장의 연결고리로
GX의 궁극적인 목적은 기존 산업의 배출량을 줄이는 데만 있지 않다. 산업 전환을 새로운 성장 기회와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강관은 한국 철강 산업의 저탄소 전환과 미래 수요를 연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분야다.
해상 풍력 하부 구조물, 수소·CO₂ 이송용 파이프라인, 원전과 저탄소 에너지 인프라 등은 향후 투자가 확대될 가능성이 높은 시장이다. 이들 분야에서는 강도, 내식성, 용접성과 같은 기존 품질 요건에 더해 제품의 탄소 배출 정보와 공급망 투명성이 중요한 구매 조건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전기로에서 생산한 저탄소 소재가 고부가 강관 제품으로 이어지고, 다시 수소·풍력·CCUS(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 등 미래 에너지 인프라에 투입되는 구조는 산업 전환과 신시장 창출을 동시에 추구하는 GX의 취지와 부합한다.
따라서 정부와 업계는 전기로 전환, 저탄소 소재 생산, 친환경 강관 등 유망 분야를 개별 과제로 나눠 추진하기보다 하나의 중장기 로드맵으로 연결해야 한다. 저탄소 원료와 청정 전력 공급, 제품의 탄소 배출 산정과 인증, 공공 조달과 초기 시장 형성, 에너지 인프라 투자까지 일관된 방향으로 추진해야 기업도 예측 가능성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다.
기업 역시 정책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현재의 시장 소강기를 활용해 저탄소 원료와 제품의 포트폴리오를 정비하고, 탄소 배출 데이터를 축적하며, 주요 수요 기업과 공동 실증 및 장기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 때 필요한 것은 선언적인 탄소 중립 목표가 아니라 실제로 공급할 수 있는 제품과 검증된 데이터, 안정적인 원료와 에너지 공급망이기 때문이다. 그린스틸 수요 부진은 탄소 중립 경쟁의 종료가 아니라 다음 경쟁을 앞둔 조정 현상으로 볼 여지가 있다. 산업 전환기의 승자는 규제가 가장 강한 시기에만 움직인 기업이 아니라 시장의 관심이 느슨해진 시기에도 준비를 멈추지 않은 기업이었다. 지금의 소강기를 단순히 견디는 데 그칠 것인지, GX를 통해 전기로와 강관을 새로운 성장 축으로 전환할 것인지에 따라 한국 철강 산업의 미래 위치는 달라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