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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s+ 2026-02-26

전북 무주군 덕유산에서 만난 설경

겨울의 문턱을 지나면 산은 흰 눈에 덮인 채 조용히 숨을 고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단풍객으로 북적였던 덕유산은 이제 적막할 만큼 사람의 발길이 드물다. 눈꽃이 만개한 향적봉, 얼음 아래 숨 쉬는 구천동 계곡, 이 겨울 덕유산 능선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자연이 들려주는 가장 순수한 언어, '고요함'을 배운다.

겨울 덕유산 산행, 고요함 속으로 들어서다

덕유산

덕유산은 경남 함양군과 거창군,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에 걸쳐 있다. 남쪽의 부드러움과 북쪽의 웅장함을 함께 품은 이 산은 사계절이 모두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겨울 풍경이 유독 매력적이다.

구천동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하는 완만한 오름길

시린 듯이 차가웠던 겨울, 구천동탐방지원센터를 들머리로 덕유산 산행에 올랐다. 이곳에서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탐방로는 편도 8.5km 거리고, 약 3시간 남짓 걸어야 하는 거리다. 단단히 결심하고 들어선 탐방로는 다행히도 경사가 완만하고 곳곳에 쉼터가 있어 큰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었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걸음을 옮기다 보면, 숨이 저절로 가빠진다. 바로 이때, 눈부신 세상이 펼쳐졌다. 겨울나무들이 눈꽃 터널을 만든 좁다란 계단. 또 다른 세계로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아득한 풍경 속에 숨소리만 귓전을 울린다. 시야를 가득 채운 새하얀 눈과 짙푸른 하늘의 선명한 대비는 어떤 화려한 색의 조합보다 찬란하고 고결하다.

이 풍경을 보고 있으면 왜 옛사람들이 덕유산의 겨울 풍경에 찬사를 보냈는지 실감이 난다. 곱게 반짝이는 능선을 걷는 시간은 마치 눈의 궁전에 놓인 계단을 오르는 듯한 꿈결 같은 시간이 된다.

백련사, 전설과 함께 머무는 겨울 산사

그렇게 한참 호사스러운 산행을 이어가자, 세월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일주문이 나타났다. 신라 신문왕 때 백련이 암자를 짓고 수도하던 중 흰 연꽃이 솟아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백련사다. 산그림자가 드리운 백련사 경내를 거닐며 절을 감싸듯 둘러선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속세의 먼지가 걷히고 마음이 정화되는 것만 같다.

백련사에서 향적봉까지는 약 2.5km로 비교적 짧은 코스에 속한다. 하지만 경사가 급해 눈길에서는 더더욱 주의를 기울이며 천천히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고지가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볍다. 발밑에서 눈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소복이 눈이 덮인 바위들을 지나 나무들이 키를 낮추기 시작하자, 하늘이 열리며 정상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향적봉 정상석 앞에 서면, 사방으로 펼쳐진 산맥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지리산이, 서쪽으로는 소백산까지 시야가 닿는다. 눈 덮인 산맥들은 파도처럼 이어지고, 하늘과 산의 경계가 흐리게 느껴진다.

'당신의 마음에도 눈이 내리길'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진 향적봉 대피소 앞에 서면 문장처럼 마음 한쪽이 포근해진다. 나 자신도 몰랐던 깊은 곳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가는 기분이다.

산 아래 또 다른 겨울, 구천동과 무주리조트

덕유산

얼음 아래 흐르는 구천동계곡의 생명력

산 아래로 내려오면 또 다른 겨울의 얼굴이 기다리고 있다. 덕유산의 대표 계곡, 구천동계곡이 그 주인공이다. 이름처럼 아홉 번의 굽이마다 이야기가 흐른다.

계곡 초입에는 '구천동 33경' 중 일부가 이어진다. 수심대, 일사대, 수심교를 지나며 눈 덮인 바위 사이로 잔잔한 물소리가 들려온다. 겨울의 계곡은 얼어붙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생명의 숨결이 흐른다. 얼음 틈새로 졸졸 흐르는 물줄기는 고유한 산중에 선율을 더한다.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얼음 송이가 매달려 반짝이는 길가의 억새 사이로 한 마리 새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오른다. 나무 사이로 김이 오르는 산장 카페를 찾아, 따뜻한 유자차 한 잔과 갓 구운 군밤 한 봉지로 추위를 녹이고 있으면 이런 고요한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절실했는지 새삼 깨닫는다.

설천봉과 스키장의 빛, 겨울을 즐기는 또 다른 방식

해 질 무렵 덕유산 어귀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무주리조트 스키장의 불빛은 설원 위를 수놓고,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스키어들은 짜릿한 질주를 즐긴다. 이곳은 초보자용부터 중급자용까지 다양한 슬로프가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 곳이다.

꼭 스키를 타지 않더라도 좋다. 설천봉 곤돌라 전망대에서 일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얀 설원과 붉은 노을이 맞닿은 풍경이 뭉클하게 다가온다. 따뜻한 캔 커피를 양손에 쥐고 풍경을 감상하고 있으면 얼어있던 몸에도 온기가 번진다. 멀고 험한 여정을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과 덕유산 설경의 여운이 함께 스며드는 순간이다.

덕유산

겨울의 산은 차갑다. 하지만 동시에 아늑하고 따뜻한 품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세상의 소음이 멎고 바람 소리, 흩날리는 눈 소리, 그리고 숨소리만 들리는 그곳에서 우리는 다시 걸을 힘을 얻는다. 말없이 전하는 자연의 위로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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