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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의 끝에서 울린 목소리,
    인간을 향하다

    2026년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

    권력의 끝에서 울린 목소리, 인간을 향하다

    2026년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

    지난 3월 6일, 느지막이 겨울의 끝을 전하며 내린 싸락눈 속에서도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격정 어린 선율로 달아올랐다. 이날 무대에 오른 작품은 가에타노 도니체티의 오페라 <로베르토 데브뢰>로, 벨칸토 양식의 정점으로 불린다. 단순한 역사극을 넘어 권력 구조 속에서 무너져 내리는 인간의 감정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은 올해도 대중이 평소 쉽게 접하기 어려운 레퍼토리를 선보이며, 보다 깊은 예술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었다.

    사적인 감정이 아닌 거대한 구조로서의 비극

    2015년부터 매년 엄선된 작품을 무대에 올려온 세아이운형문화재단 음악회가 이번에 선보인 작품은 <로베르토 데브뢰>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흔히 사랑과 배신의 이야기로 요약되지만, 이 작품의 본질은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층위에 놓여 있다. 엘리자베타 1세와 로베르토, 노팅엄 공작과 사라로 이어지는 관계는 단순한 삼각 구도를 넘어선다. 네 인물이 서로를 향해 교차하는 이 사각의 구조 속에서 감정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정치적 판단이 되고, 의심은 감정이 아닌 권력의 작동 방식으로 변환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곧 누군가를 의심하는 일이 되며, 그 의심은 결국 처벌의 근거가 된다. 이처럼 작품은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기보다 감정이 권력에 의해 어떻게 재편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음악은 사건을 설명하기보다는 인간의 내면으로 깊숙이 침잠한다. 선율은 점점 절제되고 긴장감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응축된다. 그리고 마침내 여왕이 왕관을 내려놓는 순간, 그것은 역사적 장면이 아니라 한 인간이 감당해 온 무게가 조용히 무너지는 장면으로 읽힌다. 객석은 잠시 숨을 죽인 채 그 좁게 쪼개진 균열을 함께 통과한다.

    시간이 빚은 목소리가 주는 거대한 감동

    이번 무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완벽한 하모니를 가능하게 한 ‘시간’에 있다.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이 오랜 시간 후원해 온 성악가들이 한 작품 안에서 만나 각자의 시간과 경험이 빚은 목소리를 포개며 깊이 있는 울림을 만들어냈다. 이는 단순한 협연을 넘어 재단의 지속적인 예술 후원이 하나의 무대 위에서 결실로 이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휘자 데이비드 이를 비롯해 소프라노 최지은, 테너 김범진, 바리톤 최인식 등은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의 후원을 바탕으로 국제 무대에서 성장해 온 아티스트들로, 이번 공연에서 다시 한자리에 모여 더욱 단단한 호흡을 완성했다. 서로 다른 무대 경험을 쌓아온 이들의 축적된 시간은 음악 속에서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작품의 밀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테너 김범진의 로베르토는 서정성과 불안을 교차시키며, 완성된 영웅의 면모보다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흔들리는 한 인간의 결을 드러냈다. 소프라노 최지은의 엘리자베타는 권력자의 위엄과 인간적 고독 사이를 오가며 인물의 이중적인 구조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섬세한 감정 표현을 통해 인간의 내면이 어떻게 균열되는지를 소리로 구현했다. 바리톤 최인식의 노팅엄 공작은 감정을 직접 표출하기보다 끝까지 억누르고 축적한 긴장 속에서 감정의 파동을 깊이 있게 전달하며 극의 중심을 잡았다. 사라는 그 모든 관계의 중심에서 침묵으로 긴장을 유지하는 중요한 축으로 기능했다. 이날 무대에서 울린 성악가의 소리는 단순히 음정을 높이는 기교가 아니라, 오래 붙잡고 있던 감정이 끝내 밀려 올라오는 순간의 전율처럼 다가왔다. 특히 그 소리는 감정을 직접 드러내기보다 폭발 직전의 상태를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술적 실험처럼 느껴졌다.

    인간을 마주 보는 예술의 세계

    세아이운형문화재단은 순수 문화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지녔던 이운형 회장의 뜻을 기리기 위해 2013년 설립됐다. 이후 젊은 성악가의 발굴과 성장, 그리고 주요 무대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원을 이어오며, 단순한 후원을 넘어 예술가의 여정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

    이번 음악회는 그렇게 축적된 시간을 한 작품 안에서 다시 교차하는 자리였다. 저마다의 경로를 지나온 성악가들이 무대 위에서 만나는 순간, 관객은 하모니의 극치를 경험하게 된다.

    매년 작품 선정에서 드러나는 방향성 역시 분명하다. 익숙함에 기대기보다 작품성과 예술성을 기준으로 레퍼토리를 선택하며 음악회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작품의 구조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오케스트라는 과도하게 전면에 나서기보다 성악의 흐름을 정교하게 받쳐주며 음악적 밀도를 유지했다. 지휘를 맡은 데이비드 이는 극적 과잉을 피하면서도 선율과 긴장 사이의 균형을 정교하게 이끌어냈다. 덕분에 음악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인물들이 향하는 방향을 명확하게 짚었다. 연출 역시 과장된 장치나 설명적 연출 대신 인물 간의 거리와 시선, 그리고 정지된 순간들을 통해 긴장을 형성했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다.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조차도 사랑과 의심, 그리고 선택과 후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객석에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단지 음악의 여운 때문만이 아니라, 작품이 던진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선택의 무게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가. 공연이 막을 내린 뒤, 이제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