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CHEMY OF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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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찰하다

    공간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글. 김경인 브이아이랜드 대표·
    공간 디자이너

    공간을 바꾸면, 모든 것이 바뀐다

    글. 김경인 브이아이랜드 대표·공간 디자이너

    한때 공간은 기능이었다. 비를 막고, 사람을 수용하고, 물건을 보관하고, 일을 처리하는 물리적 조건. 좋은 공간은 효율적이고 튼튼하며 관리하기 쉬운 공간이었다. 그 말은 지금도 틀리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기능에서 경험으로

    오늘날 사람들은 공간을 단순히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느끼고, 기억하며, 비교한다. 같은 사무실인데도 유독 집중이 잘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같은 매장인데도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곳이 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지 못해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 어떤 공간은 사람을 재촉하고, 어떤 공간은 사람을 머물게 만든다. 스위스 로잔에 위치한 ‘롤렉스 러닝 센터(Rolex Learning Center)’는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전통적인 도서관처럼 기능별로 공간을 잘게 나누지 않았다. 도서관, 정보센터, 토론 공간, 학습 공간, 카페와 레스토랑이 하나의 큰 흐름 속에 놓여 있다. 책을 읽는 사람, 걷는 사람, 쉬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이 하나의 유기적인 지형 위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벽으로 공간을 구획하는 대신, 완만한 경사와 시선의 흐름이 사람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기능이 수행되는가’보다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머무르며, 무엇을 경험하는가’이다. 공간은 더 이상 기능을 담는 상자가 아니다. 경험의 리듬을 설계하는 장치다.

    삶의 질은 가까운 공간에서 시작된다

    삶의 질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종종 소득, 제도, 복지, 건강 같은 거시적인 단어를 떠올린다. 물론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하루를 가장 가까이에서 좌우하는 것은 결국 공간이다. 우리는 하루 대부분을 어떤 공간 안에서 보낸다. 집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일터로 이동하며, 상업공간과 공공공간을 오가고, 때로는 병원과 돌봄의 공간에 머무른다. 사람의 하루를 직접 어루만지는 것은 늘 가까운 요소들이다. 빛이 어떻게 들어오는지, 앉을 자리가 있는지, 시야가 막히는지 트이는지, 조용히 숨을 돌릴 틈이 있는지에 따라 일상의 결이 달라진다. 재료와 색채가 안정감을 주는 공간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든다. 결국 공간의 질은 생활의 질과 분리될 수 없다.

    영국의 암 환자 지원센터인 ‘매기스 센터(Maggie’s Centre)’는 이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암환자와 가족을 위한 이 공간은 처음부터 ‘병원처럼 보이지 않는 공간’을 지향했다. 병원은 기능적으로 꼭 필요한 곳이지만, 특유의 차가운 분위기로 사람을 위축시키기도 한다. 병원에 들어설 때 느끼는 막연한 긴장감이 그렇다.

    매기스 센터는 그 반대의 경험을 제안한다. 내 집 같은 따뜻한 분위기, 사려 깊게 조절된 빛, 바깥 풍경이 내다보이는 창, 함께 둘러앉을 수 있는 부엌 같은 공간. 이곳에서 공간은 치료의 배경에 머물지 않는다. 환자를 덜 불안하게 하고, 조금 더 사람답게 머무르게 돕는 치유의 환경이 된다. 좋은 공간은 반드시 화려한 공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을 덜 지치게 하는 공간이 진짜 좋은 공간이다. 덜 긴장하게 하고, 덜 고립되게 하며, 조금 더 자연스럽게 숨 쉴 수 있게 하는 공간 말이다.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벽과 바닥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그 공간에 머무는 사람의 하루가 흘러가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시각적 요소는 집중력과 스트레스를 바꾼다

    공간의 시각적 요소는 종종 과소평가된다. 사람들은 디자인을 취향의 문제쯤으로 여기며 예쁜지, 세련됐는지, 유행에 맞는지 같은 표면적인 기준으로만 판단하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공간 디자인은 훨씬 깊은 차원의 문제다. 빛은 사람의 긴장도를 바꾸고, 색은 감정의 속도를 바꾸며, 동선은 몸의 리듬을 바꾼다. 결국 공간의 시각적 요소는 집중력과 스트레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쉽게 말해, 빛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장치가 아니다. 그 공간이 사람을 얼마나 덜 피곤하게 하는지, 얼마나 업무에 몰입하게 하는지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다. 자연광이 충분하고 눈부심이 정교하게 조절된 환경은 사람을 한층 편안하게 만든다. 시각 환경이 안정된 공간에서는 집중력도 자연스럽게 높아진다.

    아랍에미리트의 ‘루브르 아부다비(Louvre Abu Dhabi)’의 거대한 돔 아래 풍경을 떠올려보면 이 말의 의미가 더 분명해진다. 그곳에서 빛은 한꺼번에 쏟아지지 않는다. 기하학적인 여러 겹의 패턴을 통과한 햇빛이 바닥 위로 흩어지듯 내려온다. 사막의 강렬한 햇빛이 이곳에서는 부드러운 ‘빛의 비’가 된다. 사람은 같은 빛을 전혀 다르게 경험한다. 눈부심은 줄고, 긴장은 누그러지며, 공간은 한층 깊어진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사실은 분명하다. 빛은 단순히 조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잘 설계된 시선의 깊이, 과하지 않은 색채, 안정된 표면과 빛의 반사는 사람의 집중력과 스트레스에 직접 맞닿아 있다.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괜히 목소리를 낮추고, 어떤 공간에서는 금방 나가고 싶어 하곤 한다. 그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공간의 시각적 환경이 우리 몸을 먼저 설득하거나 거부하기 때문이다.

    공간의 또 다른 언어, 산업 소재

    이쯤에서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다. 설계가 공간의 구조를 만든다면, 소재는 그 구조의 표정을 만든다는 점이다. 같은 형태의 건축물이라도 어떤 재료를 쓰느냐에 따라 공간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갖는다. 빛을 흡수하는 표면은 차분함을 만들고, 빛을 반사하는 표면은 선명함과 긴장감을 높인다. 질감이 살아 있는 표면은 시각만으로도 촉각을 상상하게 하고, 얇은 프레임이나 투과성 있는 막은 공간을 한층 가볍게 느끼게 만든다. 이제 소재는 설계 뒤에 따라오는 마감재에 그치지 않고, 공간을 읽게 하는 또 하나의 언어로 자리 잡았다. 사람은 도면보다 먼저 표면을 마주하고, 구조보다 먼저 재료가 주는 인상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Guggenheim Museum Bilbao)’은 이 사실을 가장 강렬하게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이 건물의 외벽을 감싸고 있는 티타늄 금속 외피는 단지 외장 마감재에 머물지 않는다. 건물 전체의 독창적인 인상을 만드는 주인공이다. 곡면으로 흐르는 금속 표면은 거대한 덩어리를 무겁게 보이게 하는 대신 부드럽게 흐르도록 만든다. 빛이 닿을 때마다 표정이 바뀌고, 보는 각도에 따라 건물은 각기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금속은 여기서 차갑고 단단한 구조재의 역할에서 벗어나, 공간의 감정을 빚어내는 심미적 재료가 된다. 과거 산업 소재는 오랫동안 뒤에 있었다. 얼마나 튼튼한지, 오래가는지, 관리가 쉬운지 등 주로 물리적 성능으로만 평가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오늘날의 산업 소재는 공간의 선과 깊이, 인상을 만드는 핵심 디자인 요소가 됐다. 즉, ‘성능의 재료’인 동시에 ‘감각의 재료’인 것이다. 사람들은 재료의 정확한 이름은 몰라도, 그 재료가 빚어낸 공간의 분위기는 기억한다.

    디자인의 가능성은 결국 만드는 기술에서 넓어진다

    좋은 디자인은 아이디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재료를 얼마나 정교하게 다룰 수 있는지가 그 아이디어의 크기를 결정한다. 자르고, 접고, 휘고, 뚫고, 표면을 처리하는 가공 기술은 단지 제작 단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형태가 어디까지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는지, 표면이 얼마나 섬세해질 수 있는지, 결과적으로 공간이 사용자에게 어떤 감각을 선사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핵심 조건이다.

    따라서 현대 디자인은 형태를 먼저 그리고 재료를 나중에 끼워 넣는 방식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렵다. 구조와 제작, 표면과 감각이 동시에 설계돼야 한다. 뛰어난 가공 기술은 재료 본연의 물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사람이 느끼는 표정과 깊이를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마카오의 ‘모르페우스 호텔(Morpheus Hotel)’은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준다. 이 건축물은 구조와 외관이 분리되지 않는다. 외부의 패턴이 곧 구조이고, 구조가 곧 건물의 인상이 된다. 기술이 뒤로 숨지 않고 미학과 전면적으로 결합된 것이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 못지않게 어떻게 만들 것인가가 중요해진 시대의 건축을 대변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소재와 가공 기술은 더 이상 보조 역할에 머무르지 않는다. 건축 내외장재, 인테리어 마감재는 물론 가전제품의 외관에 이르기까지, 사람은 기능을 이해하기 전에 표면을 먼저 인식하고 그 표면에서 제품의 완성도를 읽어낸다. 제품과 공간은 겉보기에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재’라는 공통된 매개체를 통해 하나의 경험으로 기억된다.

    철은 오늘의 디자인 언어가 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 철은 더 이상 구조와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철은 이제 건축물의 보이지 않는 뼈대에만 숨어 있는 재료가 아니다. 공간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제품의 첫인상을 결정하며, 사용자의 감각적 경험을 정교하게 다듬는 핵심 재료로 진화했다. 색과 질감, 빛의 반사율과 표면의 깊이, 가공의 정밀도에 따라 철은 전혀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철이 가진 특유의 단단함은 세련미가 되고, 차가움은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며, 본연의 기능은 경험으로 확장된다. 결국 공간을 바꾸면 많은 것이 바뀐다. 일하는 방식이 바뀌고, 머무는 시간이 달라지며, 스트레스의 밀도가 변한다. 나아가 어떤 브랜드를 기억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기능을 넘어 경험을 설계하는 이 시대에, 좋은 공간은 결국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해를 현실로 옮기는 힘은 다름 아닌 소재와 가공 기술에서 나온다.

    오늘날 철은 공간의 아름다움과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우리의 일상을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는 현대적인 디자인 언어가 됐다. 연금술이란 무()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마법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물질의 가능성을 끝까지 끌어올리는 장인의 노력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철을 통해 공간의 감각과 경험을 새롭게 빚어내는 사람들, 그리고 철의 표면에 아름다움과 기능, 기술과 감성을 함께 새겨 넣는 이 시대의 사람들을 ‘디자인의 연금술사’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