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찰하다

    기술과 제품을 넘어
    : 가치를 창조하는 도구로서의 혁신

    글. 박재민 건국대학교 기술경영학과 교수

    기술과 제품을 넘어 : 가치를 창조하는 도구로서의 혁신

    글. 박재민 건국대학교 기술경영학과 교수

    1913년 8월의 어느 날, 셰필드의 한 제철공이 철강 조각을 내다 버렸다. 해리 브레어리(Harry Brearley)에게 주어진 과제는 단순했다. 소총 총열이 너무 빨리 침식되니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합금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크롬을 첨가해 보았지만 새로 만든 철강은 총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결국 시제품들은 마당의 고철 더미로 던져졌다. 몇 주 뒤, 브레어리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 더미에 있던 모든 것이 녹슬었으나 그의 ‘실패작들’만은 예외였다. 그것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만든 합금은 오늘날 스테인리스강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정작 이 ‘절대 녹슬지 않는 금속’의 진정한 쓰임새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길 건너에 있던 식기 제조업자였고, 이 합금에 적당한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그곳 공장장이었다. 그리고 1930년, 크라이슬러 빌딩에 크루프의 크롬-니켈강으로 만든 첨탑이 올라갔을 때 현대 제강 기술의 아이콘이 되었다. 발명은 어느 오후 동안 이루어졌고, 20년 후에 완성된 셈이었다.

    이것이 전하는 교훈은 불편하지만 명쾌하다. 혁신은 기술로서 작동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손에 실질적인 가치를 창조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실제 혁신이 네 단계로 구성된 순환 고리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연구는 노력을 기술로 바꾸고 기술은 제품에 투영된다. 고객이 그 제품의 가치를 인정하면 수익 창출로 이어지고, 이 수익의 일부는 다시 기업의 역량 개발과 연구의 밑거름이 된다. 이 순환 고리가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갈 때 기업은 선순환 성장을 이룬다. 반대로 어느 한 단계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모든 부서가 각자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린다 해도 기업 전체의 혁신은 멈추고 만다.

    혁신이란 ‘지식 창조(Knowledge Creation)—가치 창조(Value Creation)—가치 획득(Value Capture)—역량 획득(Capability Building)이라는 과정의 묶음’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성공적인 혁신을 이끌 일곱 가지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이 중 앞의 네 가지는 혁신의 시동을 거는 방법이다. 이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면 나머지 세 가지 원칙을 수행하라. 이는 혁신이 지속적으로 작동하고 더 빠르게 성과를 내도록 이끌 것이다.

    첫째, 혁신을 체계화하라.

    P&G는 오랫동안 가장 혁신적인 소비재 기업으로 군림했다. 하지만 경쟁사들의 프로젝트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연구개발을 수행했음에도 정작 성장 목표는 달성할 수 없었다. 급기야 2000년 무렵, 크레스트(Crest) 브랜드는 1960년대부터 지켜온 치약 시장의 왕좌를 빼앗기고 말았다. 회사는 더 많은 신제품과 마케팅으로 대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반전을 이끌어낸 것은 바로 혁신 지형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 P&G는 혁신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다. 더 좋게, 더 싸게, 더 빠르게 만드는 점진적 개선인 유지 혁신, 포장과 홍보를 통한 상업적 혁신, 새로운 기능을 담아 제품 카테고리를 재구성하는 전환적 유지 혁신, 그리고 기존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와해성 혁신이었다. 이 중 세 번째 방식을 통해 다양한 치아 관리 기능을 하나의 튜브에 담은 ‘프로헬스(Pro-Health)’가 만들어졌고, 네 번째 영역에서는 ‘화이트스트립스’가 등장했다. 이는 500달러에 달하는 치과 미백 치료를 44달러짜리 상자에 담긴 미백 테이프로 대체한 제품이었다. 이 제품은 해당 고객군(세그먼트)의 90%를 장악했다.

    그렇다면 당신의 혁신 지도는 어떤가? 거의 모든 프로젝트가 첫 칸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가? 비어 있는 칸들이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곳이 바로 우리가 개척해야 할 새로운 시장이라고 말이다.

    둘째, 고객의 가치 사슬을 혁신하라.

    제품만 바라보지 말고, 고객이 그 제품을 사용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살펴보자. 트라베놀(Travenol)은 병원에 일반 의료 용품을 공급하다가 가격 경쟁에서 밀리고 있었다. 비용을 더 절감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답이 없던 그때, 시카고의 한 중형 병원에 팀을 파견해 그들의 작업 과정을 면밀히 관찰했다.

    자신들이 납품한 팔레트가 하역장에 도착한 이후 벌어진 일은 놀라웠다. 분류, 배포, 집계, 검사 등 트라베놀이 이미 수행했던 작업을 병원 측이 엄청난 시간과 비용을 들여 다시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트라베놀이 자체 공정에서 힘겹게 짜낸 모든 원가 절감액을 압도하는 낭비였다. 트라베놀은 병원 내부에 코디네이터를 상주시켜 매일 재고를 파악한 뒤, 필요한 물량을 직접 주문해 야간에 채워 넣도록 했다. 트라베놀의 비용도 줄었지만 병원의 내부 물류 비용 역시 두 자릿수 이상 감소했다. 단가 인하를 요구하던 병원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공급자 주도형 재고 관리(VMI)’라 부르는 시스템의 시초다.

    날코(Nalco) 역시 이와 비슷한 접근을 통해 또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배송비 절감 목적으로 고객사의 화학 물질 탱크에 설치한 모니터링 장치를 분석한 결과, 실제 생산량에 비해 탱크의 화학 물질이 훨씬 더 빠르게 소진되고 있음을 파악했다. 확인 결과 고객사의 제조 공정에 결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이후 날코는 단순한 화학재 공급사를 넘어 고객사의 공정까지 관리해 주는 기업으로 탈바꿈했다.

    셋째, 고객 가치를 회수하라.

    스위스의 체결 부품 공급 업체인 보사드(Bossard)는 어느 날 고객사의 근로자들이 기계를 조립하는 시간보다 볼트에 수동으로 윤활유를 바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심지어 윤활유가 균일하게 칠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보사드는 화학 회사와 협력해 윤활유가 이미 균일하게 도포된 체결 부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볼트의 가격을 제조 비용이 아닌 고객이 절감하는 비용에 맞춰 설정했다. 그 결과 보사드는 업계 평균의 두 배에 달하는 영업이익률을 달성할 수 있었다.

    볼트는 가장 전형적인 범용 제품이다. 하지만 보사드는 볼트의 원가가 아니라 고객의 조립 라인에서 만들어내는 가치를 기준으로 가격을 매겼다. 평범한 볼트에 ‘고객의 비용을 줄여주는 가치’를 더하는 순간, 이 볼트는 더 이상 평범한 범용 제품이 아니었다.

    넷째, 대가 지불 방식을 혁신하라.

    ‘가치 창조’와 ‘가치 획득’은 혁신을 완성하는 핵심 구성 요소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전자에만 치열하게 혁신하고 후자는 방치하곤 한다. 그러나 누가 비용을 지불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가격을 책정하며, 수익을 언제 회수할 것인지는 모두 신중하게 설계돼야 할 영역이다.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 교수는 오래전부터 기업이 스스로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객은 누구이며 그들이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기는가?’ 그리고 ‘그 가치의 대가를 어떻게 지불받을 것인가?’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터 드러커 교수가 이 두 가지 질문을 소위 비즈니스 원리(The Theory of the Business)의 핵심으로 지적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이를 등한시한다.

    산업용 실리콘 제조 및 소재 기업인 다우코닝(Dow Corning)은 최고의 제품에 업계 최고의 기술 컨설팅 서비스를 결합해 제공했다. 하지만 특정 고객군에서는 가격에 포함된 기술 컨설팅 서비스를 굳이 원하지 않았다. 다우코닝은 핵심 제품의 가격을 깎고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는 대신, 서비스를 제외하고 실리콘만 판매하는 별도의 인터넷 플랫폼 기반 브랜드 ‘자이아미터(Xiameter)’를 출시했다. 이는 모회사의 시장을 잠식하지 않으면서도, 기존 방식이었으면 잃어버렸을 고객층을 새롭게 확보하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

    다섯째, 혁신에 주기를 부여하라.

    변화하는 세상에 대응하는 방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건에 반응하는 것이다. 1981년 야마하의 도전에 직면해 이후 18개월 동안 113개 모델을 새로 출시하거나 교체한 혼다처럼 말이다.

    다른 하나는 시간에 맞춰 자신만의 주기를 설정하는 것이다. 인텔은 무어의 법칙이라는 러닝머신 위에 스스로 올라타 시계추가 움직이듯 286, 386, 486, 펜티엄을 차례로 출시했으며, 그 결과 반도체를 사용하는 모든 산업은 인텔의 시간표에 맞춰 자신들의 계획을 짰다. 3M이 각 사업부 매출의 30%가 지난 4년 동안 출시된 제품에서 나와야 한다는 규칙을 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많은 사람들이 ASML의 현재에 감탄한다. 하지만 필자는 “무어의 법칙이 앞으로도 지속될지는 상당 부분 ASML 자체의 R&D 역량에 달려 있다”고 자신하는 이 기업에서 옛 인텔의 모습을 본다.

    혁신의 주기를 스스로 설정하는 기업은 단순히 시장에서 경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아가 산업 내 다른 모든 참여자가 해당 기업의 주기에 자신의 발을 맞추도록 이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혁신 기업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자 메달이다.

    여섯째, 제품과 고객이 아니라 ‘기회’를 관리하라.

    경영진에게 무엇을 관리하고 있는지 물어보면 대개 “우리 시장” 혹은 “우리 고객”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둘 다 함정이다. 드라이클리닝 산업은 한 세대 동안 호황을 누렸으나 결국 쇠퇴했다. 경쟁이 심화돼서가 아니라, 합성 섬유의 등장으로 더 이상 드라이클리닝이 필요하지 않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 철도 회사들은 자신들이 운송업이 아니라 철도업을 하고 있다고 확신한 채, 다른 운송 수단이 수요를 가로채는 동안 수수방관했고, 결국 1920년대에 이르러 황금기를 마감했다. 타워 레코드는 1999년에 연간 10억 달러를 벌어들이며 ‘스트리밍’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도 전에 최초의 온라인 음악 스토어를 구축했지만 정작 이것이 미래 시장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때 문화 아이콘이기도 했던 이 기업은 2006년 결국 파산했다.

    시장과 고객은 모두 잠시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산업의 판도가 크게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 인텔의 앤디 그로브(Andy Grove)는 이를 ‘전략적 변곡점’이라고 불렀다. 이런 순간에 기존 제품과 고객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은 기업은 여지없이 몰락했다.

    일곱째, 성공의 논리를 찾아내라.

    1967년 3월, 텍사스의 한 변호사 허브 켈레허(Herb Kelleher)는 롤린 킹(Rollin King)과 마주 앉아 냅킨을 꺼내 삼각형을 그려 보였다. 댈러스, 샌안토니오, 휴스턴을 잇는 삼각형이었다. 사람들이 사우스웨스트항공의 성공을 이야기할 때면 주로 단일 기종이나 빠른 항공기 회전율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성공의 원리가 아니라 실천 관행이었을 뿐이다. 성공의 핵심은 냅킨 위에 그려진 삼각형 안에 있었다.

    1967년 당시 주 경계를 넘는 노선은 연방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했으나 주 내부 노선은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텍사스 내에서만 운항하는 항공사는 원하는 만큼 자주, 저렴하게 비행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삼각형 안에는 미국 상위 20개 도시 중 5개가 포함돼 있었고, 텍사스 전체 인구의 70%가 고속도로로는 4시간, 비행기로는 1시간 거리에 밀집해 있었다. 단 세 개의 선 속에 이 사업이 왜 성공할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논리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잭 웰치(Jack Welch) 역시 1983년 코어, 기술, 서비스라는 세 개의 겹치는 원을 통해 GE의 모든 사업부가 어디에 속하는지 명쾌하게 정리해 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성공 사례 이면에는 그 기업이 왜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는 명쾌한 이유가 숨어 있다. 표면적인 운영 관행은 모방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적용해 성공한 기업은 드물다. 단지 ‘성공의 논리’만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업인지를 설명해 주며, 그 논리는 대개 냅킨 위에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단순 명쾌하다.

    연금술사들, 그들은 결국 실패했다. 단 한 번도 금을 만들지 못했고, 그들이 믿었던 거의 모든 원리는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그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좇던 ‘제품’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이다. 용광로, 증류 장치, 계측기. 그들은 원하던 물질을 만들어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실험의 ‘방법론’을 확립했고, 그 방법론은 훗날 화학과 야금학이라는 학문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처음 언급했던 혁신의 순환 고리, 그리고 그 고리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모든 기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과이며, 성과를 내기 위해 역량을 축적해야 한다. 그렇기에 많은 현대 기업들은 역량 개발에 투자하고 이를 측정하며, 그것이 축적돼 가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역량은 뚜렷한 목적이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성공적인 혁신 순환을 마치고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바로 “우리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이다.

    결국 앞선 일곱 가지 원칙을 지배하는 대원칙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의 혁신을 기업의 존재 이유와 직결시켜라. 혁신을 ‘우리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라. ‘우리가 무엇을 더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근원적인 질문이야말로 기술을 가치 있는 제안으로, 제안을 새로운 시장으로, 그리고 시장을 의미 있는 성과로 바꿔준다.

    이제 마지막 조언 하나만 남겨둔다. 앞서 언급한 모든 원칙에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신 기업들의 사례들이 함께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성공 공식을 당신만의 이야기로 다시 써 내려가는 것이다.

    혁신 지도 위에서 당신만의 빈칸을 찾고, 고객이 당신이 이뤄낸 일에 감탄하게 만들어라. 그리고 경쟁사가 탄식할 수밖에 없는 당신만의 기회의 창을 발견하라. 남을 모방하기보다 직접 그려보라. 어느 카페의 냅킨 한 장 위에.